황악산(黃岳山)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의 경계에 있는 100대 명산으로 백두대간길에 위치한다. 고도 1,111m이며, 과거에 학이 많이 살아서 황학산(黃鶴山)이라고도 불린다. 산의 북쪽에는 여시골산ㆍ괘방령(掛傍嶺), 남쪽에는 바람재ㆍ우두령(牛頭嶺)으로 이어진다. 남쪽 기슭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조계종 8대 총림 중 하나인 직지사(直指寺)가 있다. 험준하고 높은 봉우리라는 뜻에서 ‘큰 산 악(岳)' 자를 쓰는 산임에도 산세는 평평하고 완만한 편이어서 암봉이나 절벽 등이 없고 산 전체가 숲으로 울창하다.
백두대간 괘방령에서 여시골산으로 올라 황악산 정상까지는 계속 오름길로 큰 땀방울이 흐른다. 신선봉으로 내려서 망월봉을 넘기 전 좌틀하여 명적암(明寂庵)ㆍ직지사(直指寺)를 둘러보았다. 봄의 계절을 무색하게 한낮 더위가 초여름을 실감하게 하는 날이었다.
날씨 : 맑음
코스 : 괘방령-여시골산-운수봉-백운봉-황악산(1,111m)-형제봉-바람재갈림/덕대단맥분기점-신선봉-망월봉오르기전좌틀-명적암(明寂庵)-직지사(直指寺)-주차장. 16km
괘방령
영남지방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넘어갔던 고개이다. 추풍령(秋風嶺)은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연상하는 반면, 괘방령(掛傍嶺)은 방(榜)을 붙인다는 의미라서 과거에 붙는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여시골산




쉼터

운수봉
국토지리정보원에는 천덕산(天德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김천의 대표 명산인 황악산(黃岳山)을 이루는 비로봉(毘盧峰1,111m), 신선봉(神仙峰, 944m), 백운봉(白雲峰 770m), 운수봉(雲水峰 740m) 등 고봉 중 하나로서 백두대간의 한 줄기이다. 운수봉은 직지사(直指寺)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雲水庵)의 북쪽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직지사(直指寺)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인 대항면 운수리(雲水里)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운수봉(雲水峰)은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안내도)




직지사 갈림길 --> 황악산 2.2km



백운봉




선유봉





조망처


황악산
황악산(1.111m)은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와 상촌면 궁촌리,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추풍령에서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산줄기의 시작 지점이다. 높은 산임에도 석산(石山)이 아니라 토산(土山)이어서 흙의 의미를 담은 황(黃)을 써서 황악산이라고 하였다. 과거에 학이 많이 살아서 황학산(黃鶴山)이라고도 한다. 황악산은 주봉인 비로봉과 함께 백운봉(770m), 신선봉(944m), 운수봉(740m)이 있으며, 천룡대로부터 펼쳐지는 능여(能如) 계곡은 황악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추풍령과 괘방령을 지나 다시 웅장한 백두대간의 산세를 보이는 곳이며, 신라 눌지왕 2년(418)에 창건하여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가 있으며, 영동군 매곡면 지역에도 많은 사찰의 유적지가 있다.
(안내도)




형제봉
형제봉(兄弟峰)은 약 300m 거리를 두고 남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마치 우애 깊은 형제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해발 고도는 1,044m이다. 형제봉 정상부 일대의 식생은 침엽수가 매우 우세하게 나타나며, 비탈면 하단은 참나무 등의 활엽수와 침엽수가 혼재된 혼합림을 이루고 있으며, 형제봉 일대는 1,000m 이상의 고봉이 이어져 도로나 마을 등 인위적인 토지 이용이 거의 없어 자연 상태의 지형 및 생태환경이 비교적 잘 보전된 곳이다.
(안내도)

바람재갈림/덕대단맥분기점



신선봉 --> 직지사 3km




망월봉 오르기 전에 좌틀하여 명적암으로




明寂庵







내원교


직지사
천년의 역사와 세월을 간직한 황악산 직지사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선현의 지혜와 자비를 심어온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직지(直指)'라는 명칭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율사가 중수하였으며, 경순왕 4년(930) 천묵대사가 2차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태조 19년(936) 능여조사가 중창하여 큰스님들을 많이 배출하고 '동국제일가람'이라 일컬었다. 조선 정종 원년(1399) 중건이 있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중수하여 조선 8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사세를 크게 흥성시켰다. 이곳은 많은 국사, 왕사가 수도 정진하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벽계 정심선사가 조선조의 법난 때 이곳에 칩거하여 한국 선종의 대맥을 이었다. 선조 29년(1576) 왜적의 방화로 모든 전각, 당우가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여 약 60년 만인 현종 3년(1662)에야 완전히 복구하였다. 근세에 들어서는 고종 연간에 일부 중수가 있었으며, 1963년부터 30여 년간에 걸쳐 현재의 전각과 당우를 중창, 중수하였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보물 제1576호), 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앞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7호),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의 중요 문화재와 많은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다.
(안내도)












